여성운동 일기 (1)

 

     rainbow-butterfly



여성운동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지 8년째다. 내 삶의 전환점이 된 8년 전, 나는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의 도입으로 학부 신입생 모집을 그만둔 법과대학의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주변의 선배와 동기들은 대부분 사법시험 공부를 할 것인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할 것인지, 아니면 하루 빨리 취업 준비를 시작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몸과 마음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남들이 달리는 방향으로 따라 달리면 적어도 모나서 정 맞는 돌이 되는 일은 없을테니 나도 일단 달려보자는 셈이 들어 덩달아 진로계획을 세웠다. 가능하면 사법시험 막차를 타고,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구직을 할 경우를 대비해 학점 관리와 스펙쌓기도 열심히 하자.

2009년의 나는 사법시험 1차에 응시하기 위해 필요한 법학과목을 열심히 들었고, 험난한 고시 공부를 앞두고 희망과 동기를 얻기 위해 사법시험 합격 수기를 수십 편 읽었으며, 선후배 사이로 만나 시험 공부를 먼저 시작한 애인을 따라 신림동 고시서적을 들락날락했다. 3학년 때부터는 수험왕 고모씨에 빙의해 수년 동안 시험공부에만 몰두해야지 싶어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행도 다녀왔다. 그때 나는 나의 성공, 나의 영광, 나의 행복에만 집중하며 하루 하루를 야물차게 보냈다. 2009년 말, 지금은 ‘조두순 사건‘으로 불리게 된 아동 성폭력 사건을 접하기 전까지는.

폭력 피해를 경험한 이들과 함께하며 트라우마에 대한 지식을 체득한 지금은 그때 내가 왜 그리 큰 충격을 받고 무너져버렸는지를 ‘트라우마 트리거‘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언론은 조두순이 8세 아동 나영이(가명)에게 극심한 성폭력 피해를 입힌 사건을 ‘나영이 사건’이라 불렀는데, 비슷한 나이에 경험한 아동 성폭력의 기억을 묻어두고 있었던 내 이름이 때마침 나영이었다. 전국민이 ‘나영이 사건’에 분노를 터뜨리는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고모씨처럼 매일같이 법학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형법은 강간도 다루고 특수강간, 강간살인 뿐 아니라 부부강간, 위계를 이용한 간음도 다루니 내 안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일상은 완전히 망가졌다.

나는 그때 ‘트라우마’라는 말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트라우마 트리거’라는 개념을 알리가 없었다. 사실 그때 내게는 페미니즘, 여성주의도 왠지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들이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주체로 거듭나 고시에도 합격하고 승승장구하며 ‘나’의 성공, ‘나’의 영광, ‘나’의 행복만 생각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우리’ 여성집단, ‘우리’ 자매들의 인권과 안녕을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페미니즘은 종종 제 잘난 맛에 사는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음해를 당하는데 이때의 나는 오히려 성차별따위는 내 잘난 능력으로 뛰어넘으면 되지 무슨 여성운동까지 하나 생각하며 제 잘난 맛에 사는 (예비) 고학력 중산층 여성이었다.

10대 시절 내내 오지선다 문제집을 풀며 자랐고, 대학생이 된 다음에도 주어진 선택지를 칼같이 따라 전보다 두께가 늘고 가격이 비싸진 팔지선다 문제집을 풀었다. 그 어떤 문제집에도 피해자중심주의라는 말, 성폭력생존자를 지지하는 여성단체에 대한 정보, 반성폭력 페미니즘에 대한 설명은 등장하지 않았다. 내가 요즘처럼 인터넷을 활발하게 사용하지 않았기도 하고,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관심을 받지 못해 여성주의를 외치는 수많은 자매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어려운 시기였다. 전국의 대학 캠퍼스 총여학생회 활동도 침체되어 있었고 어떤 매체는 여성학의 ‘추락’을 다루기도 했다.

나는 지식도, 자원도, 여성주의 자매들도 없이 홀로 수치심에 잠겨 아파했다. 학교 옆에서 하숙을 하고있던 중이라 수업에 출석하는 때나 고시생 애인과 잠깐씩 만나는 때를 제외하고는 방 안에만 누워있었다. 몸 상태도 마음 상태도 급격히 악화됐고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다. 어느날 밤에는 잠을 못 이루다가 너무 죽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는데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그때는 분명 새벽 네시였는데 엄마는 잠결에 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내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다.

죽고 싶었다. 타인이 내가 여성이고 아동이라는 사회적 불평등의 교차점을 이용해 나를 자신의 노리개로 여기며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정했다는 분노,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던가 성폭력 피해로 인해 손상되고 더럽혀진 사람이라는 낙인에 대한 수치심, 아동 성폭력 피해에 대한 책임의 화살이 가해자나 사회에게로가 아니라 피해아동과 피해아동의 부모에게로 향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가 나를 죽고 싶도록 만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아동 성폭력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이, 특히 평생 너무나도 열심히 살았고 나를 지극히도 사랑하는 엄마가 스스로를 탓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봐 두려웠다.

페미니즘이 나를 살렸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 이끌려 학교 도서관에 나갔다. 도저히 수험서가 눈에 안 들어와 청구기호 0번이 꽃힌 책장부터 시작해 도서관 전체를 훝다가 여성학 책들을 발견한 뒤로는 매일 그 앞에만 죽치고 있었다. 그 결과 나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탓도, 피해자 아동의 엄마 탓도 아니다. 성폭력은 가해자의 탓이다.

페미니즘은 나를 살렸다. 내가 살았으니 엄마 아빠도 살았고,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들도 살았다.  나는 페미니즘이 한국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분명히 나를 구했다. 나는 엄연히 한국의 일부이자 세상의 일부이니까, 페미니즘은 벌써 한국과 일부를 구했고 세상의 일부를 구한 것이다.

엄마가 아파할 것이 너무 걱정되고 두렵고 미안했지만 말하지 않고서는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아서 엄마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엄마와 꼭 껴안고 많이 울고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여성운동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동생들도 늘 내 편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다음날 나는 휴학계를 냈고, 고시서적은 정리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여성운동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일년 동안 빙빙 돌았다. 많이 읽고, 많이 쓰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짓밟힘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고, 짓밟힘에 저항하기 위한 이론과 실천을 배우겠다는 마음을 잡고 학교로 돌아갔다. 획일성과 위계질서로 얼룩진 주류 문화가 아닌 “또 하나의 문화”를 꿈꾸며 한국 여성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선생님을 찾아가 문화인류학을 이중전공하며 다양한 앎과 삶의 형태에 대해 배웠다. 페미니즘 이론 책을 수십 권 읽다보니 현장에서의 실천이 궁금해 한국여성의전화에 찾아가 대학생기자 활동도 하고, 여성폭력 상담원교육도 받고, 가정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살인사건을 지원하는 일도 쫓아다녔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문화인류학과와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동료로 여겨주며 내 부족함을 지켜봐주는 선생님들을 여러 분 만났다. 페미니즘 법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고 유학 준비를 시작한 때부터 로스쿨 학위를 마친 오늘까지 그동안 도움을 받은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따로 쓸 계획이다.

2014년 하반기부터였는지 한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자매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집을 떠나 외국에서 지내고 있으니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온라인밖에 없었다. 불어나는 자매들에게 힘을 보태고 언젠가 폭발해 전국 방방곳곳을 휩쓸고 사회 전역을 바꾸어버릴 대중 여성운동에 가속도를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날씨란을 쫓아다니며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함께했고 나중에는 내 손에 닿는 자료란 자료는 모두 실어날랐다. 페미니즘 매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작업에도 참여했고 단 한 명이라도 더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도록 홍보에도 열중했다. 지식도, 자원도, 여성주의 자매들도 있어서 나는 아주 많이 행복해졌다.

내가 아동 성폭력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을 점차적으로 늘려 나가기는 했지만 성폭력을 둘러싼 통념과 낙인의 뿌리가 워낙 깊기에 온 세상에 드러낼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모든 생존자의 상처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 상처는 드러내어 바람을 쐬게 하고, 비슷한 경험을 한 자매들에게 보여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며,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생존과 저항을 계속해 기필코 세상을 바꾸어내고야 말 것이라는 결의을 다지는 과정을 통해서만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아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사랑하는 가족, 동반자, 선생님들, 친구들, 그리고 여성주의 자매들의 믿음과 애정, 격려를 통해 많이 자랐고 또 많이 단단해졌다. 덕분에 나로서는 “아주 특별한 용기“를 내어 폭력을 경험한 지 18년만에 마침내 온 세상에 아동 성폭력 생존 신고를 했다. 나를 살리고 아주 많이 행복해지게 한 페미니즘(여성운동)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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